얼마 전 나는 다 큰딸로부터 기분 좋은 칭찬을 받았다.
8주 동안 외국대학에서 공부하고 오더니, 한다는 말.
“엄마한테 고마웠어. 문화적으로 키워줘서. 아주 멋지게 놀았어.”
짬짬이 그 도시의 미술관, 박물관, 다운타운 명소들을 신나게 누빈 모양이다.
“이제 온 세계에 친구 깔아 놨어!
에티오피아, 아일랜드, 이탈리아, 러시아 등” 온 세계 학생들과 ‘온 캠퍼스’와 ‘오프 캠퍼스’ 친구를 삼았단다.
“요리는 역시 잘해야겠어.”
멋있게 보이려면 요리도 필수임을 알게 되어 반갑다.
“엄마 말대로 불어 공부 좀 더 할 걸.”
불어를 알면 좀 더 보이는 게 많을 것 같더란다.
나는 일갈했다. “글쎄, 잘 놀려면 공부 제대로 해야 한다니까.”
***
‘나의 교육 방침’을 ‘피교육자(?)’인 자식이 모처럼 인정을 해 주니 감격할 지경이었다.
사실 나는 ‘교육’이라는 말을 영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이른바 ‘공식 교육계’에 종사하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일지도 모른다. 교육이라는 말 대신 내가 좋아하는 말은 ‘자라기, 깨닫기, 문답하기, 해 보기’ 같은 것들이다.
부풀려 보자면, 나는 ‘소크라테스’적이고, ‘아인슈타인’적이며, '다빈치’적이다.
우리 식으로 풀자면, 나는 ‘연암 박지원’적이고, ‘퇴계 이황’적이고, ‘고산자 김정호’적이다.
해냈던 일 이상으로 이들의 삶의 방식, 자라기 방식이 좋다.
이들은 인생을 한바탕 ‘잘 놀고’ 갔던 것 아닐까?
온갖 소설에 빠진 덕분에 나는 역사, 세계사, 지리, 사회 과목들에 흥미를 가졌다. 이들 과목들은 소설 속에 엉켜 있는 사건들과 지명을 연결시키고 확인하는 도구였다.
영화도 단단히 한몫을 했다. 영화와 소설은 이렇게 극화를 했구나 또는 이렇게 틀렸구나 알아맞히는, 일종의 ‘숨은그림찾기’ 같은 게임이었다.
나는 영어 노래 듣느라 영어 공부를 했다고 해도 좋다. 중고 시절 내내 켜 놓고 살았던 AF(K)N 라디오 덕분에 영어 귀가 틔었던 것이다. 우리말 라디오는 너무 잘 들려서 집중에 방해되고, 심심하니 노래는 듣고 싶고 해서 틀어 놓았던 영어 방송, 하루는 연속 드라마의 내용이 드디어 들렸다. 그 순간의 깜짝 놀람을 지금도 기억한다. 그다음 드라마 시간을 기다리던 나 자신이 기특하고 은근히 자랑스러웠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언어라고 자랑 꽤나 하는 불어. 그런 자랑은 지나치다 싶지만, 그 분위기에 말려서 고등 시절에 일부러 학원까지 다니며 드디어 그 유명한 『어린 왕자』를 원어로 읽어 내는 짓까지 했다. 한때의 열중에 불과했지만, 나의 열중은 큰딸의 불어 공부를 도와줄 때 기막히게 사용되었고(딸의 행적을 팔아서 내 자랑을 하자면, 첫 시험 45점짜리 딸이 다음 시험 94점을 받았다.) 딸이 이제야 깨닫게 된 것과 같이 내가 문화를 맛보는 데 지금도 소용이 닿는다.
***
두 가지 공부를 안 해서 두고두고 후회하고 있다.
첫째, 우리 전통 악기 하나 배우지 못한 것. 단소나 대금 하나 배웠더라면 외국 사람들 앞에서 산조 한 가락 멋들어지게 뽑을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얼마나 멋진가? 기타 들고 피아노 한 수 하고 색소폰 부는 것보다 더 멋질 텐데.
둘째, 태권도를 못 배운 것. 왜 나의 시대에는 여자들에게 호신술을 가르치는 분위기가 없었을까.(지금도 보편적이지는 않지만) 없는 힘이나마 요령껏 쓰는 방법을 터득하면 남자들 앞에서 훨씬 더 당당할 수 있었을 것을.
역시 ‘풍류(風流)’는 알아야 하고 ‘문무(文武)’는 겸비하는 것이 좋다.^^
***
그러고 보니 도시건축을 내 일로 택한 것도 잘 놀기 위해서였나? 물론 시작할 당시엔 어림도 없었다. 놀기 위해서는커녕 어떻게든 일하고 싶은 마음만 앞섰을 터이다. 그런데 지금와서 보니 나의 일은 일하기와 놀기가 잘 구분이 안 간다. 여행도 일이요, 영화 보기도 일이고, TV 보기도 일의 한 부분이 된다.
칼 갈며 하던 공부도 일을 놀이처럼 만드는 데 도움이 되기는 되었다. 그냥 “잘하면 돼!”보다는 “이번 프로젝트의 핵심은 무엇일까, 선례는 어떤 게 있나, 어떤 의미가 있나, 역사와 어떤 관련이 있나, 어떤 문학적 연상이 있을까, 영화와는 어떤 관계일까, 사람의 어떤 심리를 건드릴까” 등. ‘얼마나 큰 프로젝트이냐’에 관계없이 ‘얼마나 뜻있는 프로젝트로 만드느냐’ 에는 역시 열심히 한 공부가 도움이 된다.
지금의 나는 ‘잘 놀려고 공부한다’ 수준은 졸업했을까? 그렇지 않다. 여전히 나는 잘 놀려고 열심히 공부한다. 예컨대, 지난밤 만난 사람과의 즐거운 대화에 끌려, 집에 돌아와서 그 사람이 얘기하던 책을 들춰보고 열심히 다시 읽는다. 왜 그 사람은 내가 그냥 넘긴 이 대목을 그리 인상적으로 봤을까? 다른 책도 더 찾아볼 것이다. 공부는 인생이다. 인생은 공부다.
나는 잘 놀고 싶다.
이왕이면 멋지게 놀고 싶다.
나는 내 딸들이 멋지게 놀았으면 좋겠다.
나는 사람들이 모두 멋지게 놀면 좋겠다.
(‘놀다’를 ‘일하다’로 바꿔도 마찬가지다.)
멋지게 놀기란 돈으로만 되는 것도 아니고 시간이 있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물론 돈과 시간은 도움이 되지만, ‘플러스 알파’가 꼭 필요하다.
딸은 왜 ‘멋있게 즐겼다’고 했을까? '제대로 공부하며 제대로 놀아보는 여섯 가지 비결'을
어느새 터득했기 때문일 것이다.
'제대로 공부하며 제대로 놀아보는 여섯 가지 비결
첫째, 새록새록 찾아보고 싶은 마음이 자꾸 더 들어서.
둘째, 보이고 들리고 느껴지는 게 자꾸 더 커짐을 느껴서.
셋째, 새로운 느낌과 생각을 친구들과 함께 이야기하고 나누고 싶어져서.
넷째, 날개가 돋고 머리가 부푸는, 자라는 느낌이 좋아서.
다섯째,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참 많구나, 인간은 위대할 수 있구나 느껴서.
여섯째, 살아 있음이란 참 좋은 것, 참 뜻있는 것임을 느끼게 되어서.
첨언:
그런데, 제대로 공부해서 제대로 놀아보려면(똑같이, 제대로 공부해서 제대로 일해 보려면)
입시몰입교육, 과외몰입교육, 시험몰입교육, 외국어몰입교육 같은 것은 금물이다.
그런데, 지금 이명박 정부의 우리 사회가 그렇게 몰아가는 것이 심히 불안하다.
제발 교육을 ‘돈벌기 도구’로 만들지 말고, 제발 교육을 ‘돈들이기 경쟁’으로 몰지 말라.
제대로 일하지도, 제대로 놀 줄도 모르는 사회가 될까 심히 걱정된다.
이런 사회에서 사회정서가 황폐화됨은 물론 결국 경쟁력도 떨어진다.
'잘' 놀기 위해 공부하는 사회, 인생 자체가 공부가 되는 사회를 만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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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카이스트 남표 횽아를 만나다
Tracked from 자존심지키기 2008/04/18 11:25 삭제어제 학부 식당에 점심을 먹으러 갔는데, 거기서 서남표 총장께서 외국인 학생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거기다가 방송사까지 동원해서... 뭐, 외국인 학생들이 많이 늘어났으니, 그네들의 이야기를 직접 듣고 싶어하나 보다 하고, 우리는 우리끼리 저~쪽에 앉아 밥을 먹고 있었다. 방송사 직원인듯한 사람이 와서는 하는 말이, 총장님이 너무 외국인들하고만 이야기를 하시는데 우리랑 약간 이야기를 해 보면 어떠냐고 한다. 다들 '싫어요.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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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도 공부하는 법에 대해서 글을 하나 블로그에 올렸는데,
우연찮게 김진애님께서 쓰신 글도 공부에 대한 글이네요. 반가와서 트랙백하나 걸고 갑니다.
저도 김진애님께서 하신 말씀에 동감 100만표 드리고 갑니다. ^^
메일이 안오니깐 블로그 더 이상 안하신 줄 알았는데 여전히 건재하시군요.
계속 메일을 통해서 방문하다가 이제야 RSS에 추가했습니다.
여전히 계속 자라기의 본이 되어주시니 감탄만 할 뿐입니다.
저는 언제나 되려는.ㅠ_ㅠ 갈 길이 멀었네요.
넘 멋진 글입니다. 미국에서 공부하느라 허우적대는 아들에게 보내주었습니다. 꼭 읽어보라고....
제 교육 관련 카페에도 좀 퍼가겠습니다. 물론 출처를 밝히고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공부할 때는 누구나 '허우적'대는 모양입니다.^^ 그 때가 최고의 시간인 것은 확실하지만, 지금 이 순간도 최고의 시간으로 만들어보지요 솜다리님. 교육관련 카페 이름 알려주시면 저도 들어가 보지요.
아~~ 그런데.. 잘놀기위해서 할게 너무 많군요..
아무 생각없이 놀면 죄를 짓는것 같은 글이네요. 그래도 잘 읽었습니다.
풍류를 몰라도.. 문무를 겸비하지 않아도...서로 편하게 놀 수 있는 세상이 빨리왔으면 좋겠습니다.^^
사람이 아무 생각없다는 것은 없는 것 같고, 얼마나 그 체험에 깊이 자기 혼신을 담느냐가 중요한 것 같아요. 놀기도 혼신을 담아서^^. 지금이라도 풍류 하나 배우고, 문무 하나 배울까 싶답니다.
지난학기 교수님 수업을 마지막으로 교환학생으로 나와있습니다.
이 말귀가 너무 마음에 꽂히네요. 놀려면 공부해라=_=
아무리 좋은 미술관을 가든,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공연을 보든 공부를 하지 않으면 내것이 되지 않고 그냥 스쳐지나가는 것들이 정말 아쉽네요.
언제나 교수님의 글에 감동을 받고 자신을 돌아봅니다.
감사합니다^^
포스터 속의 김일환 모습이 더 먼저 떠오르네요. 포셥 처리한 모습이 인상적이었지요. 로비에 걸렸던 포스터. 참 좋을 땝니다. 한 순간도 놓치지 마시되, 또 그렇게 놓치지 않으려 의식하시지 말고 온 몸으로 느끼시고, 이후 차근차근 되새겨보세요. '매일매일 자라기' 입니다. 건승!
너무 좋은 글이네요.."박미석의 꼬리자르기"제목을 들어와서 다른글도 읽게 되었읍니다..너무 중요한걸 놓치고 사는구나 싶읍니다..아이를 키우는 부모의 입장에서 아이에게 어떤 잣대를 주어야할까를 고민하고 있었는데 초석이 될 것 같읍니다..
놀기위해서 배워야한다는 논리를 우리 아이도 깨닫는 날이 왔으면 좋겠네요..
'잘 놀려 공부한다'는 핑계가 참 좋지요? 양승숙님, 아이들이 그것도 마다하지마는요^^. 제 경험상. 그래도 그런 기조를 지키다 보니까 결국은 통하더라고요. 일관된 태도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나중에 경과도 알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