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까닭에 그녀의 프로젝트는 늘 그랬듯이 사사로운 동시에 공적이고, 어긋난 동시에 바로잡혀있다"라는 대목이 아주 좋았답니다. 로렌초의 시종님은 뭐하는 분일까, 궁금합니다. 온라인 만남의 설렘이지요.
좋아하는 사람의 인생이 망가지는 모습을 보는 건 상당히 서글픈 일이다. 그런 까닭에 지난 총선에서 김진애가 서울 용산에서 낙선했을 때 나는 퍽 서운해했었다. 명색이 선대위원장까지 맡은 이가 정작 자기 지역구에서 떨어졌다는 것도 그랬을 뿐더러, 그녀라면 정말이지 아직도 구질구질한 남자들의 소굴인 국회에 가장 시원스런 바람을 불리지 않을까 싶은 기대에서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낙선한 그녀가 여느 사람처럼 시무룩해있으리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럴 인물로 생각했다면 애초에 관심을 가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지금부터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그 때 떨어진 것은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그녀만큼 관심을 가지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 주의 깊게 바라보았던 그 수많은 열린당의 국회의원들이 지금 FTA 정국 앞에서 말 그대로 어리버리 우왕좌왕하는 꼴을 보니, 솔직히 그녀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는 않았으리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녀가 생각이 있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그녀를 둘러싼 그 얼간이들의 집단과 그에 얽힌 지위와 관계가 그녀 역시 조용히 묻어가게 만들었을 게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낙선과는 비교하기 어려운 실망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결국은 잘된 일이다. 역시 끝까지 봐야하는 것이 세상사다.(물론 그녀는 지금 대통령 직속의 무슨 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다. 별로 안 유명한 자리라서 그나마 다행이다.)
그녀가 쓴 이 글 역시도 기민하되 성급하지 않은 세상사는 법을 말하고 있다. 새로운 시대의 흐름을 불러일으킨 동시에 그 힘을 극대화시켰던 2002년의 월드컵에 대한 감탄을, 그 이후의 우리 사회의 대응에 대한 비판으로 전개시킨 그녀의 주장이 그 한 예다. 다양한 논란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시민들의 자발적인 역동성을 드러냈던 2002년의 월드컵 응원과 그 무대로서의 거리의 광장화는 그야말로 세계에 유래가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결과 서울시가 추진한 잔디광장은 그야말로 어디에나 있는 흔한 잔디밭이었다. 그것도 다른 나라보다 더 접근하기 곤란한. 왜 이 나라의 정부와 공무원들은 시민들의 자발성을 그것대로 내버려두지 못하는 것일까. 어떻게든 자기들의 그 알량하고 구질구질한 형식과 문서대로 정리하고 통제하는 것을 너무 좋아한다. 그것이 과연 국민들을 항상 물에 내놓은 어린 아이로만 생각하는 그들의 오만한 의식 때문인지, 아니면 그렇게 일을 벌리면서 여기저기서 더러운 돈을 챙기려는 실제적 필요 때문인지는 속단하기 어렵지만, 결과는 일단 하등 불필요할뿐더러, 방정맞기까지 한 잔디밭이었다.
그리고 그 잔디밭을 만들게 했던 월드컵이 다시 돌아왔을 때 그 위에서 벌어진 작태는 모두가 아는 대로다. 대기업, 공무원, 미디어에 의한 물리적, 정신적, 상업적 통제는 그야말로 하나의 삼류 코미디를 만들어냈다. 그녀의 불길한 예견은 그야말로 그 극치에 이르렀던 셈이다. 이번 월드컵의 지독스런 상업성은 4년 전에는 대중들의 자발적이고 역동적인 열기에 눌려 엉겁결에 뒤쫓기 바빴던 정치, 상업 권력이 제대로 한 몫 잡으려고 나섰다는 점에서 우선적으로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그 마당인 서울시청 앞 광장의 문제였다. 그 이전까지는 상황에 맞춰서 광장이자 도로로서 유동성을 가짐으로써 대중들의 주체적이고 자발적인 선택에 의존해왔던 장소를 잔디밭으로 만듦으로써 더 이상 그 용도의 결정권을 대중이 행사할 수 없게 만들었다. 게다가 단순한 광장도 아닌 잔디광장이라는 특수성은 더 이상 도로가 아닌 광장으로서 상시적으로 열려있는 듯이 보이는 그 장소의 지배권을 전적으로 서울시가 틀어쥐도록 했다.
광장을 광장으로 만드는 것은 단지 개개인의 통행이 자유롭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모일 수 있다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제 서울시청 앞 광장은 누구도 올 수 없지만 언제든지 누구나 모일 수 있었던 곳에서, 누구나 올 수 있지만 누구도 모일 수 없는 곳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이번 월드컵의 시청 앞 광장에서 말 그대로 깔려죽은 시민적 자발성 앞에서 그녀는 무어라 말했을지 새삼 궁금해진다. 제발 모처럼 대중이 잘하고 있을 때 공무원들은 가만히 있었으면 싶다. 그들은 기민한 것이 아니라 성급할 뿐이었다.
물론 이 책이 이렇게 시론(時論)적 성격의 글로 가득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책은 그녀가 이 사회에 주장하는 다양하고 새로운 프로젝트를 그녀 자신의 삶과 연결시켜서 우리에게 설득시키고 있다. 대외적으로는 쿨하고 뭔가 특별한 삶을 살자고 말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삶에서는 현실의 벽을 핑계대면서 범상하기 그지없는 일상을 꾸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지만, 이 글들을 보면서 적어도 그녀는 다르리라는 기대를 품게 되기도 했다. 그녀가 말하는 이런 프로젝트가 단순히 지식인으로서의 사회적 요구나, 혹은 그녀가 스스로 느끼는 내적인 당위성 내지는 압력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녀의 자발적인 바람과 확신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믿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그녀는 무엇보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이러한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보다도 그녀 자신을 위해서, 그녀 자신이 원해서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니 자신의 삶과 주장이 따로 놀 수 없는 것이라고 믿을 수밖에. 일례로 두 딸의 고3엄마를 하면서 그녀가 정한 프로젝트는 흔한 자녀교육서 속의 원칙과는 다른 것이었지만, 분명 현실적인 동시에 설득력이 있는 것이었는데, 무엇보다도 그녀 자신의 실천과 그에 따른 진정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소수만이 지킬 수 있는 불변하는 원칙을 말한 것이 아니라, 모두가 당하는 그 상황을 맞이하는 마음가짐을 주장했기에, 그것은 오직 그녀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지킬 수 있는 것이었다.
그녀가 쓰는 이 글의 매력은 이처럼 우리가 생각하지 못하는 바를 주장하면서도 자신의 생각을 우리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이 그 생각대로 했을 때 얼마나 즐거웠는지, 삶이 생기 있었는지를 느낄 수 있게끔 자연스럽게 인도하는 데 있다. 하지만 동시에 읽는 우리로 하여금 '인생이 얼마나 멋진지'를 알게 해주고 싶다는 그녀의 목적의식이 시종일관 뚜렷한 만큼 글이 그저 그녀의 기발한 생각에서 비롯된 신변잡기로 마냥 흘러가지도 않는다. 야외에서 별을 보고 달을 보며 목욕하고 있는 일본의 노천온천은 사진으로만 봐도 물론 한번쯤 즐기고 싶다는 소망을 품게 만들지만, 그녀의 글 속에서 별을 보며 하는 목욕은 그저 얄팍한 흥미가 아니라, 좀더 절실하고 필요한 무언가로 다가온다. 그것은 그저 일시적으로 즐기고 말 것이 아니라, 내 생활의 윤기를 위해 자주 접해야만 하는 순간으로 느껴진다. 그녀는 스치고 지나가는 관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의 즐거움을 우리의 일상으로 끌어들이는 방법을 말하면서 우리에게 함께 즐기자고, 즐길 수 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즐거움은 비단 공간에서만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일상적으로 맺는 사람들간의 관계 속에서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다. 심지어는 그녀가 얼마나 소중히 여겼는지 읽는 이에게도 충분히 다가오는 그녀의 어머니의 장례식에서조차도 그녀는 결국 즐거움이 숨어있는 틈새를 찾아내고야 말았다. 여느 집안 못지 않게, 번잡하고 소란스러운 그 순간에도 그녀만은 자신만의 시선을 온전히 망각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관점을 가족들이나 독자들에게 강요하지도 않았다. 역시 기민하지만 성급하지 않게.
거듭 이야기하지만 나에게 이 책은 그동안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여러 공적 인물 중의 한 사람이었던 김진애의 삶을 좀더 내밀히 들여다볼 수 있다는 데에 의미가 있었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마지막 네 번째 프로젝트들은 그동안의 그녀의 공적인 삶에 더 가깝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나의 이러한 관찰은 그녀의 개인적이고 내적인 삶이 그동안 내가 알고 있었던 그녀의 공적인 주장과 삶과 어긋나지 않았기에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당위성에 눌려서 쾌락이 짓이겨지는 삶도 있고, 쾌락에 놀아나는 동안 당위성이 도망가버린 삶도 있지만, 그녀는 진정한 쾌락은 결국 사회적, 개인적인 당위성과 어긋날 수 없다는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그녀의 프로젝트는 늘 그랬듯이 사사로운 동시에 공적이고, 어긋난 동시에 바로잡혀있다.
딸만 둘 키우는 부모의 입장에서 아들보다 딸이 낫고, 딸만 둘이라면 더없이 완벽하다는 그녀의 주장은 단순히 개인적인 것일 수 없는 동시에, 편협해 보이기도 하지만 실은 그녀의 그런 주장의 여전히 반대쪽 극단에서 머뭇대고 있는 우리 사회이기에 결국은 바로 잡혀있는 것이다. 물론 그녀는 여전히 그녀답게 이러한 사회적 당위성이 아니라, 우선적으로 그녀 자신이 딸을 키우면서 느낀 삶의 즐거움을 무엇보다도 중시하고 있다. 어쩌면 의도적인 정치적 올바름이란 그녀에겐 짐만 될 뿐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지금 딸들이 처한 사회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딸을 키우는 즐거움을 설파하고 있지만, 그런 어려움 따위 없다면 훨씬 더 자유롭게 딸을 키우는 즐거움을 말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그녀가 원하는 것은 즐거울 수 있어서 행복한 삶과 사회이니 말이다.
http://blog.aladdin.co.kr/lorenzo/918632
로렌초의시종() 2006-07-21 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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